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사실을 에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깨닫고 있었다. 미궁에서 늘 밝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때때로 에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깊은 우울을 끌어안고 있던 아버지가, 미궁을 나와서 어머니의 행방을 알려준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을지 내심 짐작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렇게 또래보다 몇 발짝 일찍 철이 들어버린 에반의 눈에는 아주 많은 것이 보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무척 많았다.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달콤한 말을 하다가도 뒤로 돌아서면 추한 진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싫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외의 일면을 발견하는 순간은 무척이나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에서 아버지나 정말 좋아하는 에렌델 님의 인간관계는 에반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관찰대상이었는데, 그 관심은 두 사람과 여러 의미로 긴밀하게 엮인 선생님에게로 향하곤 했다.

 

에반의 선생님, 라이넬 리이난트 백작은 좋은 사람이었다. 귀족적이고, 우아하고, 검술 실력은 에렌델 님과 막상막하일 정도로 뛰어나고. 타고난 성품이 다정한데다 어린아이를 좋아해 옛날부터 에반을 제 조카처럼 귀애하며 잘 챙겨주었다. 10년 전에 미궁에서 평민으로 위장한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라이넬은 유서 깊은 귀족가 영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리 솜씨가 뛰어났고 그 솜씨를 십분 발휘해 어린 에반이 좋아할 법한 간식들을 만들어주곤 했다. 마치 삼촌처럼 살뜰하게 저를 챙겨주는 라이넬에게 홀딱 넘어간 에반은 며칠에 한 번 오는 라이넬과의 간식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더랬다. 그때는 아직 아버지가 라이넬을 무척 싫어한다는 걸 몰랐다. 그 이유가 라이넬의 에렌델 님의 연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건 조금 더 나이를 먹고서였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의아했다. 에반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좋아한다는데 그건 좋은 일 아닌가? 어린아이였기에 가능한 단순한 사고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라이넬을 싫어하는 이유는 홋날 생길 에반의 연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에렌델 님에게 그러셨듯, 에반을 존중해서 뭐라고 말씀하시진 않겠지만. 아버지가 제 연인을 좋아하게 되는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을 것이다.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라이넬의 이름만 들어도 파르르 떠시는 걸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라이넬이 뿔난 아버지 앞에서 부러 더 얄밉게 구는 편이기도 하지만. 응.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황제 에렌델 아이제나흐를 떠받치는 두 측근의 험악한 관계는 황궁에서 일하는 자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유명한 이야기였다. 일에 있어서는 철저한 상호 협력 관계지만 사적으로는 라이넬을 치떨리게 싫어하는 이든 라르비아. 그것 보다는 이든을 덜 싫어하지만 만날 때마다 이든의 성질을 교묘하게 긁어대는 라이넬 리이난트의 은근한 신경전은 어지간히 눈치 없는 자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을 만큼 한 주에 몇 번은 황궁 어딘가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광경이었으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이가 나쁜데 어릴땐 왜 몰랐는지. 종종 에반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두 사람이 대놓고 서로를 비꼬며 으르렁대다 에반이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면 애써 어색하게 친한 척을 한 적도 꽤 있었는데. 지금 떠올리면 절로 실소가 터져나올 만큼 우스운 광경이다. 세월이 흐르며 두 어른이 에반 앞에서 하는 친한 척은 꽤 자연스러워졌지만 그만큼 에반도 자랐다. 평소 관계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정도로 매끄럽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뼈있는 말을 예쁘게 포장해 물밑에서 몰래 찔러댄다 한다 한들, 에반이 그들의 속내를 읽지 못할 일은 없게 될 정도로.


에반은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고 천천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얼굴은 비췄을 테니 잠시 쉬었다 돌아가야겠다. 오늘은 아는 얼굴도 안 보이고. 오늘이 본인 생일이니 출궁을 안 할 리가 없는데 왜 안 보이는지. 연회가 시작될 때 잠시 얼굴을 비춘 에렌델 님도 조금 시무룩한 기색이었던 걸 보니 아직 안 온 건가. 에반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폭 쉬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휴게실 문 앞에 선 에반은 크게 후회했다.

 

내가 어리석었지. 바로 돌아갈걸. 휴게실 소파가 푹신해봐야 얼마나 푹신하겠나. 아무리 좋아봐야 작년에 이사나가 선물로 준 내 침대만은 못할텐데. 조금 열린 문틈에서 에반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 중 하나가 흘러나왔다.

 

"천한 왕국 출신의 나쁜 버릇이 어디 가나요. 폐하께서 너그럽게 봐 주시니 기회랍시고 들러붙어서는."

 

누군가가 그 말에 답하기 전에 에반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왕국 출신의 천박한 기회주의자. 더 들을 것도 없이 라이넬 리이난트 백작을 가리키는 말임을 잘 알았다. 데뷔한 이래 사교계를 드나들며 벌써 여러 번 들은 이야기지만 라이넬 리이난트라는 사람을 잘 아는 에반으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평가였다. 라이넬이 일신의 영달과 권력을 탐한다니 말도 안 된다. 라이넬은 그저, 에렌델과 자신 사이의 모든 문제들을 합한 것 이상으로 에렌델을 사랑할 뿐이다. 제국과 왕국 양쪽 모두에게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연인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며, 그를 돕기로 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에반은 라이넬을 왕국을 저버린 배신자라 욕하는 것은 못 들은 척 넘길 수 있어도 운 좋게 잡은 기회로 황제에게 들러붙어 권력을 탐한다는 말은 흘려 들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어린 영애가 백작의 그럴듯한 외양에 넘어갔다고 수군거리더라도 에반은 신경쓰지 않을 셈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라이넬이 정말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할 지라도 그 면모가 라이넬의 전부는 아니니까.

 

예컨대,

 

"못 들은 셈 치렴, 에반."

 

저보다 에반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 귀를 막아주는 다정함이라던가.

저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연인의 곁을 지키는 깊은 애정이라던가.

그를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모습들 또한 라이넬 리이난트의 것이다.

 

그런 것이다.

 

 

---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누가 와도 라이넬이 금방 눈치채겠다, 정원 구석의 벤치에 앉은 에반은 마음 놓고 본격적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전 저러는 거 마음에 안 든다고요."

"그래. 하지만 거기 끼어들면 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거야."

"그치만,"

"네 마음은 기쁘지만 나보단 네 평판이 더 중요한 시기니까."

 

에반, 하고 덧붙이는 부름은 다정하지만 그만큼 단호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에반은 부드럽게 선을 긋는 남자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보았다.

 

"아빠도 라이넬을 싫어하긴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욕한 적은 없는 걸요."

 

곱게 기른 주군을 채간 망할 새끼라는 둥, 재수없게 한 마디도 안 진다는 둥, 낯짝만 반반할 것이지 쓸데없이 능력있어선 짜증난다는 둥 욕하는 건 꽤 들어봤지만. 에반은 현명하게 뒷말을 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야기인지 눈치챈 라이넬은 듣더니 모호한 얼굴로 웃었다.

 

"그게 라르비아 경의 장점이긴 하지."

 

나도 그쪽 싫어하지만,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듯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겠지. 그래도 옛날엔 아닌 척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둘 다 삼자대면의 순간을 제외하면 그런 척도 안 한다. 그래서 에반도 생략된 말에 대고 물었다.

 

"에렌델 님 때문에요?"

 

라이넬은 소리 없이 웃으면서 에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확실히 최악의 평판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여 년간 많은 영애와 영식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다닌 남자답다. 준수한 외모와 완벽한 매너도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섬세한 배려가 그 장점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물론 당사자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주기는 커녕, 애인에게서 한 순간도 시선을 돌릴 생각이 없는 지고지순한 로맨티스트지만.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넘기던 사실이 궁금해졌다. 둘 다 굉장한 사람이 맞지만, 어떤 점 때문에 사귀게 된 걸까.

 

"라이넬은 에렌델 님의 어떤 점이 좋은 거예요?"

"글쎄..."

 

의외의 답이었다. 다른 사람들만큼 장황하지는 않아도 에렌델 님 자랑이 한바구니는 나올 줄 알았는데. 에반은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좋은 점보단, 지나치게 호구라서 마음에 안 드는데."

"호구?"

"응.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지. 에렌델이 지금까지 한 호구노릇을 읊자면 하룻밤으로도 부족할 걸. 그리고 황제씩이나 됐으면 평소에도 위엄 좀 챙기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경계심도 없이 돌아다니는 꼴을 볼 때마다 짜증나고. 하긴, 공작가에 있을 때도 그런 거 없었지."

"......"

 

참 가차없기도 하셔라. 라이넬이 작정하면 제국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신랄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주군이자 연인인 에렌델 님께도 그럴 줄은 몰랐다. 다만,

 

"바보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다가 어디 공식 석상에서 실수로 그런 얼굴 보일까 항상 걱정이지."

 

그 말투만은 와르르 쏟아지는 불평불만과 달리 꿈결처럼 부드러웠다. 분명히 제 연인의 온갖 흉을 보고 있는데도 애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와 표정.

 

"그래도 내 눈엔 제일 예뻐 보이니 문제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애정어린 말.

에반은 라이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보다도요?"

 

그는 조금 놀란 눈으로 에반을 쳐다보더니, 몇 번 눈을 깜박이곤 답했다.

 

"그런 건 묻는 게 아냐, 에반."

"왜요?"

"일단 네 아빠랑 싸우기 귀찮고..."

 

말을 흐리던 라이넬이 문득 고개를 틀어 제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머나. 에반은 입을 가리며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저 녀석 삐치는 것도 보기 싫거든"

 

커다란 정원수 뒤에 빼꼼 삐져나온 금발 몇 가닥이 잽싸게 나무 뒤로 사라졌다. 허둥지둥대다 몇 번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리고, 기척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이 시대에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경지에 걸맞지 않는 어설픈 도망에 에반은 웃어야 할지 상대가 상대니 꾹 참아야 할지 고민하며 눈을 굴렸다. 물론 그 상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백작님께서는 시원한 웃음을 짧게 터뜨렸지만.

 

"에반."

"네?"

"잡으러 가야할 것 같아서."

"그렇네요."

 

그제야 에반도 웃을 수 있었다. 한바탕 까르르 웃어댄 에반은 라이넬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가볍게 그 손등에 입맞췄다.

 

"그럼 영애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라이넬은 어디까지나 느긋한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반은 그에게 아직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굳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지 않았다. 저 발길의 끝에 있을 사람은 라이넬에게 에반이 할 수 없을 축하까지 듬뿍 해줄 것이다. 나는 나중에 만나면 하지, 뭐.

 

에반이 할 일은 선생님께 배운 우아한 태도로 이곳을 떠나 라르비아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잠시 그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던 에반은 사뿐히 일어나 돌아갔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의 품으로 돌아갔듯, 에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가 기다릴 집으로.



---



"그 좋은 머리로 새랑 동급일 줄은 몰랐는데."

잽싸게 침실로 뛰쳐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아 잔뜩 달아오른 뺨에 한참 손부채질을 하던 에렌델의 어깨가 움칠 튀었다.

"뭐, 뭐?"

"네가 새냐고. 방으로 도망쳐서 머리만 박고 있으면 안전한 줄 알게."

"그, 그런 적 없거든?"

"그래?"

언제 도착했는지 방에 몰래 들어와 문가에 기대 서 있던 라이넬이 자세를 바로하고 에렌델에게 다가왔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흔적이 채 빠지지 않은 뺨을 장갑 낀 손으로 쓸어내리자 야릇한 감촉에 에렌델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라이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폐하께서는 거기서 도망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날 기다렸잖아. 속삭이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에렌델이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가 늦게 와서 그렇잖아. 예정대로면 어제 돌아왔어야 했어."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무슨 일?"

"아직은 비밀."

의뭉스럽게 웃는 얼굴과 '아직은'이라 단서를 붙이는 데서 라이넬의 급한 용무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해버린 에렌델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오늘은 12월의 첫날이자 제 연인의 생일. 그리고 조금 있으면 13월, 극소수밖에 알지 못하는 에렌델 자신의 생일이다.

에렌델은 애써 라이넬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11시.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다. 서랍장으로 다가간 에렌델은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조금 주춤거리는 기색으로 돌아왔다.

"라이넬, 그, 생일 축하해."


머뭇거리며 상자를 내미는 연인의 모습에 라이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올해의 평가는 어떨지 긴장되는 모양이다. 비록 에렌델의 센스가 그다지 좋지 못한 건 사실이며, 라이넬은 연인이 주는 선물이라면 뭐든 기쁘게 받는 동시에 에렌델의 부족한 센스를 비판하기에 주저함이 없다곤 해도 그렇게까지 움츠러들 필요는 없는데. 사랑하는 이의 애정과 정성이 담긴 선물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라이넬은 상자를 든 손을 감싸며 다른 팔로 에렌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감사와 함께 깊게 입을 맞추자 에렌델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한 팔로 라이넬의 목을 감으며 매달려온다. 라이넬에게 힘껏 호응하며 전적으로 기대오는 그 무게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긴 입맞춤 끝에 무릎 위에 에렌델을 앉히고 침대에 걸터앉은 라이넬은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린 듯한 에렌델의 시선을 받으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제 눈과 흡사한 짙은 녹색의 커프스였다. 보석을 감싼 섬세한 세공과 윗부분에 작게 새겨진 리이난트 가의 문장을 살펴본 라이넬은 미소를 머금고 에렌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들어?"

"응. 무척."

긴장으로 조금 굳은 뺨에 쪼듯이 연이어 입맞추자 에렌델의 얼굴이 이내 풀어지며 행복한 미소를 떠올린다. 그 얼굴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빛나보여 라이넬은 가볍게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꽤 센스 있잖아. 혼자 고른 거야?"

"으, 음. ...아니."

"그러면?"

"이든이랑 세라피나에게 조언을 좀."

"현명한 선택이야. 남쪽 변두리 부족의 주술용 가면이나 주먹만한 다이아몬드가 달린 브로치 같은 건 사용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라이넬이 연애 초기에 받은 처참한 선물 중 몇을 언급하자 에렌델은 윽, 하고 신음을 삼키며 울상을 지었다.

"그건 이제 잊어버려... 처분해도 되니까."

"그럴 순 없지. 네가 준 선물은 어떤 거라도 전부 소중한걸."

"...읏."

여러 의미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에렌델이 맞닿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은 라이넬의 손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던 에렌델은 딱 하나, 방법이 남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것, 좀, 놔줘. 아직 줄 게 남았단 말야."

"뭔데?"

순순히 손을 놔준 라이넬에게서 재빨리 떨어진 에렌델은 신발을 벗더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라이넬은 흥미진진하게 에렌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침대 머리맡으로 기어가 베개 아래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에렌델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에렌델?"

에렌델이 꺼낸 물건은 하나로 연결된 검은 가죽 벨트 더미였다. 사람 몸에 채우면 딱 알맞을 법한 벨트 길이와 연결부 따위를 빠르게 훑어본 라이넬은 조금 의아한 기색으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에렌델은 이름이 불리자 몸을 움찔대면서도 꿋꿋하게 그것을 침대 위에 늘어놓더니 기둥으로 손을 뻗어 천장에 연결된 긴 줄을 끄집어 내렸다.

"에렌델? 이건 왜..."

"......"

"에렌델."

"...선물"

발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로 에렌델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겉옷을 벗고, 타이를 풀어내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다. 이 상황은, 그러니까.

"네 취향대로 괴롭혀 달라는 게 선물이야?"

"이, 이건 내가 아니라 네 취향이잖아!"

아. 더는 안 되겠다. 라이넬은 결국 배를 붙잡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한참을 웃어도 계속 웃음이 나와 종내에는 복근이 당겨왔지만 그칠 수가 없었다. 큰맘 먹고 선물을 내어놓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에렌델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반응이었다.

"왜, 왜 웃는 건데?"

"미안, 푸흐, 나 조금만, 흐읍, 더, 크흡, 웃고."

"라이넬!"

버티지 못한 에렌델은 냅다 라이넬의 등짝을 내리쳤다. 라이넬은 그제야 조금 웃음이 잦아드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가를 훔쳤다.

"그럴리가 없잖아. 난 순전히 네가 좋아하길래 시작한 건데."

"뭐?"

"묶이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네 취향이잖아. 힘들게 할수록 좋아하는 거."

"하,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단정짓는 라이넬의 말에 에렌델은 당황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어 다리를 들썩이는 에렌델을 본 라이넬은 기척도 없이 손을 뻗어 에렌델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잔뜩 당황한 상태였던 에렌델은 그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고, 라이넬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라이넬은 그런 에렌델을 덮치듯 내려다보며 반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었다.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목울대를 응시하며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싫지 않아. 네가 나한테 매달리는 걸 볼 수 있으니까."

"...읏. 라이, 넬."

"사랑해 에렌델. 선물 잘 받을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 라이넬은 에렌델이 준비한 벨트를 손에 쥐었다. 기대 이상의, 굉장한 생일 선물을 받았으니 제대로 사용해 주는 것이 예의겠지. 라이넬은 느긋하게, 흡족하도록 사랑하는 연인을 취했다. 얼마 남지 않았던 그의 생일이 지나고도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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