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트 영지에 손님이 찾아왔다.

 근래 들어서는 별다를 일도 아니었다. 수 년 전, 오르트 남작가의 차남이 잠시 행방불명이 되었다 돌아와 놀라운 수완으로 가문을 재건한 이래 영지를 찾는 사람들은 부쩍 늘어났다. 귀족, 상인, 일꾼, 이주민, 여행자 등.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다 할 짐도 없이 겨우 두 명 뿐인 단촐한 일행은 특별할 것 없는 방문객이었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거침없이 오르트 남작가로 향했다는 점을 빼면. 따라서 용건을 묻는 문지기에게 건넨 답 한 마디가 남작가를 들썩이게 만들 것이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히엔에게 율겐이 약속 지키러 왔다고 전해 주겠나."

 형에게 가주 자리를 양보한 후, 실험실에서 꿈쩍도 않던 히엔 오르트가 집사의 전언 한 마디를 듣기 무섭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집사는 물론이요 가운도 벗지 않은 채로 복도를 질주하는 히엔을 본 가족들도 매우 놀랐다. 가문을 재건하고 영지가 안정된 이래 카르밀 왕국에 큰 화제를 몰고 온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다른 귀족들은 물론, 왕궁에서의 초청도 모른체하고 끼니 거르기마저 숨 쉬듯 하며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가 제 발로 뛰쳐나온 것이다.

 "율겐, 당신...!"

 저택 로비에 다다라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회색 머리 남자를 발견한 히엔은 무언가를 외치려다 주변에 사용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이군."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가운은 벗고 오지 그랬어."

 "어라, 스티ㅇ...."

 "여기선 스팅."

 율겐 뒤에서 피식 웃으며 나타난 금발 미남은 그렇게 호칭을 못 박더니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얼굴은 물론, 그 태도 또한 반가운 것이라 히엔은 목 위까지 치솟았던 질문을 꿀꺽 삼켰다. 그가 스팅으로서 찾아온 이유는 능히 짐작이 갔다. 저를 배려해 주겠다는데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실례다. 히엔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반응을 보니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본데?"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해 차를 내온 후, 사용인이 전부 물러가자 스팅이 먼저 떡밥을 던졌다. 가장 궁금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끙끙대고 있던 히엔은 그 화제를 냉큼 물었다.

 "나라 하나가 망했는데 소식을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하죠. 그래서 율겐 당신, 대체 뭐 하고 다닌 거야? 스티어 씨... 아니, 스팅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난 좀 거들었고."

 현재 카르밀 왕국의 떠오르는 유명인사가 히엔 오르트라면 대륙 전체에서는 하르갈 왕국을 무너뜨린 대마족 스티어의 악명이 자자했다. 스티어가 미친듯이 날뛰고 다닌 덕에 조금 묻힌 감이 있지만 하르갈 왕실 붕괴의 주역이 반역 누명을 쓰고 도망쳤던 왕실 정령술사 율겐이라는 사실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고. 히엔은 차향을 맡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같이 미궁을 헤매며 구르던 시절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전쟁터에서 깨나 굴렀단 얘기를 듣긴 했다. 그래도 설마 입 험하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으며, 나잇값도 못하고 자신과 왁왁대던 아저씨가 관리자 포기하고 나가더니 자기 조국을 뒤엎을 줄 누가 알았겠나. 아니, 생각해보면 진실을 알고서도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미궁 관리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보통 배포로는 못 할 일이긴 했다. 응. 그렇다 해도 참 스케일 크게 저질렀지, 율겐. 처음 하르갈에서 일어난 쿠데타의 전말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새삼 밀려왔다.

 "그럼 당신이 미궁에 들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그래."

 "나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하나도 몰랐네."

 나비쉬도, 스팅도, ...렌티스도.

 진실이 스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히엔은 아무것도 몰랐다. 제 자리를 지키고, 남을 믿어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때의 무지에서 비롯된 무력감은 지금도 어찌할 수 없었다. 입맛이 조금 씁쓸해져 찻잔 안의 홍차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율겐이 덤덤하게 한마디 건넸다.

 "애한테 안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어른은 없으니까."

 히엔은 고개를 들었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딱딱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안다. 저것이 율겐 나름대로의 위로라는 것을. 하지만 고마운 마음을 감추고 불퉁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율겐이랑 놀 때는 불가항력이다, 이거.

 "애 아니야. 이제 스물 넘었거든? 이젠 내가 당신보다 더 크거든?"

 "...그리고 난 서른이 넘었지. 얼마나 컸든 내 눈에는 애 맞다."

 "아하. 늙은 게 자랑이야, 율겐?"

 "마치 너는 서른이 안 될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아저씨 될 무렵이면 당신은 할아버지가 될 텐데 뭘."

 이 노-땅아. 한마디 덧붙이곤 혀를 쭉 내밀어 놀리자 율겐은 이를 악물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마 여기가 오르트 남작가가 아니라 미궁이었다면 이미 목숨을 건 추격전이 벌어졌을 기세다. 히엔이 금방이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자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스팅이 낄낄 웃으며 율겐을 달랬다.

 "둘이 이러는 것도 오랜만에 보니 재밌네. 그래도 그만 해. 너도 진정하고."

 그가 손등으로 볼을 슬슬 쓰다듬으니 율겐은 금세 어깨의 힘을 빼더니 스팅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어르는 것이 영 못마땅했는지 얼굴이 조금 붉었다.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도 잠깐. 히엔은 스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후로 둘이 계속 같이 다닌 건가요?"

 "뭐, 그렇지. 율겐 어머니부터 찾아뵙고, 그 다음에 하르갈을 무너뜨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여기 오기 전에는 테루시아도 만나고 왔지. 테루시아가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더라."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으나 한량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중인 스팅의 입에서 언급되니 참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르갈 운운하는 대목에서 어색하게 웃던 히엔은 테루시아의 이름이 나오자 반색했다.

 "테루시아는 잘 지내요? 아프다던 아이는 다 나았고요?"

 "이젠 다 나았어. 건강해. 정도 많고, 좋은 아이였지. 처음에는 낯을 좀 가리나 싶더니 떠날 즈음에는 율겐을 제법 잘 따르게 됐는데...."

 "됐는데?"

 "그냥 그랬다고."

 스팅은 말꼬리를 흐리며 미묘하게 웃었다. 시선을 돌리니 율겐이 조금 질린 눈을 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역시 묘했다.

 스티어와 율겐이 미궁에 있던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은 히엔도 익히 아는 바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스티어는 스팅이라는 이름으로 제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율겐은... 히엔 본인과의 첫만남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듯이 사교성 한번 끝내주는 성격이니 좋은 사이라 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미궁을 헤쳐나가는 사이, 두 사람은 주변에서 보기에도 꽤나 친밀해졌다. 심지어 스티어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한 번 좁혀진 거리가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처음 스티어가 제 정체를 드러냈을 때만 해도 그의 계약자인 나비쉬 외에 그에게 먼저 다가갈 엄두를 낸 사람이 없었는데도 그러했다.

 그런 사이인 만큼 스티어가 관리자라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율겐을 유달리 신경썼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다. 율겐이 라펠의 환영에게 칼을 맞고 쓰러졌을 때, 늘 한발 물러서 있던 스티어가 나서서 치료에 대한 조언을 해 준 일도 있고. 하지만 스티어는 미궁의 관리자다. 총 관리자인 제오라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이 시기에, 단순한 친분으로 이미 시험을 포기한 율겐을 몇 년 씩이나 따라다녀도 괜찮은 건가? 소문을 들어 보면 둘이 계약까지 한 모양이고. 과거의 동료들과 재회한 일은 기쁘지만 여러모로 생각해 볼수록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기는 하다.

 무언가가 잡힐 듯 말 듯 아리송한 상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히엔은 머리 한구석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난 몇 년, 숨가쁘게 서로의 길을 걷다 재회한 동료들이다. 율겐과 약속한 대로 왕후장상 부럽지 않은 대접을 해 주며 회포를 풀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히엔은 씩 웃었다.

 "오늘 저녁은 기대해. 주방장에게 최고의 요리를 준비하라고 일러뒀으니까. 아마 스팅에게도 뒤지지 않는 솜씨일 걸? 왕실에서 일하다 은퇴하겠다고 나온 사람이야. 이제 쉬겠다는 걸 설득하느라 애 좀 먹었지."

 "그 정도라면 기대해 봐야겠군."

 "마음껏 기대해 줘. 나도 참, 미궁에서 입맛만 까다로워져서 나온 것 같단 말이지. 스티어 씨도 그렇고 새가 해준 요리도 참 맛있었는데. 특히 그 닭..."

 "치킨 말인가."

 "응, 그거. 요즘도 밤샘할 때는 종종 먹어."

 "밤에는 잠을 자야지. 야식 너무 먹다가는 젊은 나이에 배 나온다? 그러면 아가씨들한테 인기 없어."

 스팅이 놀리듯 말하자 히엔은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끙, 앓는 소리까지는 내는 것을 보니...

 "벌써 나왔나?"

 "아냣! 그냥..."

 "그럼 뭐지?"

 히엔은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긴, 어차피 저 둘도 나라 하나 뒤엎느라 바빴다니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겠다. 곧 마음을 정한 히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마저 털어놓았다.

 "가문을 일으킨 다음엔 이것저것 연구하느라 정신 없었더니 지금까지 예쁜 아가씨들을 못 만나고 다닌 게 좀 아쉬워져서..."

 아직도 혼자란 말이지. 서글픈 고백이 끝나고 응접실에는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큭..."

 "푸핫! 하, 아하하... 아, 지금 건 회심의 농담이야? 잠깐, 나 배, 배가, 크흡..."

 "웃지 마, 이 화상들아!"

 대놓고 소파에 엎어져 뒹굴기 시작한 스팅은 포기했다. 그나마 율겐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음을 삭히려는 듯 보였으나 이쪽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아주, 매우 기분 나빴다. 뭐야, 자기들도 솔로면서! 히엔은 성질을 부리며 두 사람을 걷어찼다. 물론 쉽게 걷어차여 줄 위인들이 아니었기에 약만 더 올랐지만.

 폭소도 잦아들고 히엔도 호스트라는 자기 위치를 상기하며 좀 진정했을 즈음, 집사가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손님 두 분의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알았어. 안내는 내가 할게."

 집사를 내보낸 히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볼까?"

 "그러지."

 선뜻 일어선 율겐 함께 응접실을 나서려 했으나 스팅은 그때까지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시선을 천장으로 향하더리 되레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히엔. 방은 두 개야?"

 "그런데요?"

 당연히 사람 수대로 방을 준비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율겐도 히엔이 당황한 것을 눈치챘는지 그에게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스팅."

 들은 척도 않는다. 스팅은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율겐 쪽을 한 번 보고는, 이내 씩 웃었다. 그리고 히엔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무언가를 터뜨렸다.

 "방은 하나면 되는데."

 단 한 마디로.

 "네...?"

 그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히엔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시 눈으로 그를 좇으니, 어느새 스팅은 율겐 옆에 딱 붙어 서서 그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저래도 괜찮은 건가? 미궁에서 좀 유해졌다고는 하나 그 성깔이라면 스팅을 내동댕이쳐도 이상하지 않을 율겐이다. 허나 그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기만 할 뿐, 스팅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 그래. 저 반응. 아까도 본 기억이 있다. 조금 이상하다 싶었지만 설마 했는데. 맙소사. 진짜 그거였냐.

 히엔은 드디어 눈치챘다.

 효과는 굉장했다!

 "에에에에에엑?!"

 둘이 하는 양을 죄다 본 율겐은 이마를 짚었다. 또다, 또. 손그늘 아래로 나직한 한숨만 흘러나왔다.

 "으음, 일단...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고마워."

 집주인으로서 방 안내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혼이 빠진 모양새로 앞서 걷던 히엔은 조금 걷는 동안 정신이 돌아왔는지 어색한 목소리로 둘을 축하했다. 엎드려 절 받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스팅은 그 답게 과정은 신경 쓰지 않고서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답례했다.

 "그래서 두 사람,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

 "그야 미궁에 있을 때부터?"

 "엑? 진짜요? 그렇게 빨리?"

 율겐은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오는 질문 안 막고 나불대는 놈이 제 짝이니 별 효과가 없다.

 "응. 내 정체 밝히고 나서였지? 다른 사람들은 금방 눈치채던데. 너도 참 늦네."

 "모, 모를 수도 있죠! 보통 그런 상황에서 누가 태평하게 연애나 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게다가 그 때면 스티ㅇ... 아니, 스팅이 율겐을 죽이네 마네 할 때 아니예요?!"

 "그렇긴 했지. 사귀게 되면서 노선은 좀 바꿨지만."

 히엔이 허허 웃으며 혀를 내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숨 걸고 구른 건 같은데. 아니다. 칼 맞고 사경을 헤맨 횟수는 내 쪽이 저 꼬맹이랑 비교가 불가능하게 많았거늘. 졸지에 태평하게 마족이랑 짝짜꿍 사랑놀음이나 한 셈이 되어버린 남자가 눈을 치떴다. 그러나 움찔은 커녕, 신경 쓰는 놈도 없다. 숫제 히엔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캐내는 양 목소리까지 낮춰 묻고 있다.

 "아무튼 참고 삼아 묻는 건데, ...고백은요?"

 "율겐이."

 "...정말?"

 히엔은 눈을 크게 뜨더니 그게 사실이냐는 듯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 온다. 이 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율겐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니까 둘 다 이제 그만하고 닥쳐."


 남작가의 만찬은 히엔이 장담한 대로 풍성했다.

 동석한 남작가 식구들 또한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식사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이전에 히엔이 말한 바처럼, 이권다툼이 일상인 귀족으로 살아가기엔 여전히 어수룩한 구석이 있었지만 율겐에게 있어 그런 부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실종되었던 기간 동안 함께한 동료였다는 이야기에 호의를 갖고 그를 대하는 사람들이었다. 호의에 호의로 답하면 그만일 뿐, 굳이 평가할 필요는 없다.

 히엔의 동생은 율겐이 뛰어난 정령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유달리 관심을 보였다. 사심 없이 반짝이는 눈빛에 드물게 친절을 베풀 마음이 들어 한 번 구경해 보겠냐 권하자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박수를 짝짝 쳤다. 아직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상기된 표정이 히엔이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때를 연상시킨다. 히엔과 똑 닮은 어린 얼굴이 제법 귀여워 율겐은 쿡쿡 웃었다. 옆에 앉아있던 스팅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웬일이야? 먼저 인심도 쓰고."

 "그러는 너는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데."

 "알면서 묻긴."

 스팅은 뚱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율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널 닮아가나 보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게. 뒷말은 생략했지만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한 쌍의 시선이 등 뒤에 날아와 꽃히는 것이 느껴진다. 율겐은 어깨를 으쓱하곤 벌써 테라스로 달려가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 아이에게 향했다.


 늦은 밤, 히엔의 서재에는 둘만 남았다. 스티어는 미궁에 있을 때와 같은 이유를 대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실로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적당히 알콜이 들어간 히엔은 노골적으로 책망하는 눈을 하고 율겐을 흘겨보았다.

 "와, 율겐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 배신자."

 "딱히 숨긴 기억은 없는데."

 율겐은 심상히 대꾸했다. 그랬다. 숨긴 적은 없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율겐은 잔에 반쯤 남은 와인을 한 번에 비우며 뒷말을 삼켰다. 어차피 히엔 외에는 금방들 알아차리지 않았나. 렌티스라든가, 나비쉬라든가. 사실 테루시아는 긴가민가했지만...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랬고.

 자연스럽게 테루시아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아까처럼 스티어가 방은 하나면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방 열쇠를 하나만 건네던 테루시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고 있는 어른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테루시아의 모습이.

 "......"

 "율겐? 벌써 취했어?"

 "...그런가 보군."

 스티어가 이 얘기는 꺼내지 않아 다행이다. 율겐은 그때마냥 급격히 화끈거리는 귓가를 취기 탓으로 애써 돌리며 잔을 채웠다. 히엔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만,

 "...둘이 진짜 사귀는 거 맞구나. 난 환상에서 본 거 빼고 스티어 씨가 실제로 그런 눈빛 하는 거 오늘 처음 봤어."

 이제 들을 귀 없다고 안쪽 꽉찬 직구로 찔러들어왔을 뿐이지. 이런 걸 보면 못 본 사이에 제법 어른스러워진 게 맞다. 율겐에게 안 좋은 쪽으로.

 "그런가."

 율겐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그 정도 눈빛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하르갈에 복수하던 때만이 아니라 여행하면서도 들리는 곳마다 한두 번씩은 보게 된 눈빛이다. 하여간 질투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서. 덕분에 어찌나 익숙해졌는지 어둠 속에서 붉은 눈 한 쌍만 섬짓하게 빛나도 태연하게 눈살을 찌푸릴 수 있게 되었다. 종종 따라붙는, 이대로 가두고 싶다든가 박제하고 싶다든가 하는 말들도 의연하게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다음날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을지가 좀 걱정될 뿐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반쯤 남은 잔을 한 입에 털어넣은 히엔이 한탄했다.

 "근데 그렇게 노려보는게 하필이면 내 동생이라니. 아이고 불쌍한 녀석. 율겐, 나는 말야아... 내가 오늘 우리집 막내 되는 줄 알았다고. 걔가 아직 어리고 눈치 없어서 아무것도 몰랐으니 망정이지!"

 "너처럼 말인가?"

 "그래 나처러...엄..."

 율겐의 심상한 대꾸에 옹야옹야 맞장구치던 히엔이 입을 다물었다. 율겐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율게-엔!"

 거 목청 한번 우렁차기도 하지. 완벽한 타이밍에 귀를 막은 율겐은 시선을 창가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눈을 부라리며 율겐을 노려보던 히엔은 율겐의 딴청이 끝날 생각을 않자 결국 한숨을 쉬며 새 와인병과 오프너를 손에 들었다.

 "정말이지. 당신 성격 끝장나게 나쁜 거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 야."

 말을 마치며 코르크 마개를 뽕, 따낸 히엔이 제 잔부터 채우려 하자 율겐이 손을 내밀었다.

 "꼴사납게 자작하지 말고 이리 내."

 "이제 와서 이미지 수습하려고 해 봤자 늦었다?"

 "...뭐라는 건가."

 "뭐긴 뭐야. 성격 나쁘다는 소리지."

 율겐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잔이나 가득 채워주었다. 꾹꾹 눌러담듯 말아주니 히엔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헤죽 웃었다. 많이 자라긴 했지만 이러는 걸 보니 애는 애다. 제법 성숙해진 얼굴 위로 미궁에 있던 시절의 앳된 모습이 겹쳐 보여 율겐도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긴 해도 해도 히엔은 좋은 친구였다.

 "성격 더러운 율겐 씨이."

 옛날 생각나는 얼굴로 옛날과 다를 바 없이 얄미운 소리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율겐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추억에 젖을 틈을 안 주는군.

 "뭐냐, 건방진 놈."

 "그래서 어쩌다 먼저 고백까지 한 거야?"

 침묵은 늘어진 촛대 그림자처럼 길게, 아주 기일게 이어졌다. 히엔이 표면장력의 한계를 시험할 기세로 찰랑거리던 잔을 홀짝홀짝 반쯤 비울 무렵, 율겐이 인생의 난제를 앞에 둔 듯 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홧김에?"

 "엥?"

 의문형이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하자. 의문형이다.

 히엔은 그 짧은 답에 눈만 몇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게 뭐, 흐어, 야, 어흐, 어흐흑, 나 죽, 흐으, 네."

 "...영원히 닥치게 해주기 전에 닥쳐."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율겐이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물들이도록 한참이나 폭소했다.

 미궁에서 나온 후 각자의 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율겐이 어머니와 보낸 짧은 한 때. 히엔이 집안을 일으키고 미궁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시작한 연구 등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하르갈 멸망으로 이어졌다. 고작 며칠만에 나라 하나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대사건을 복수 당사자의 입으로 생생하게 듣는 히엔의 표정은 때때로 경악에 물들고, 가끔 어이없어하며, 어쩌다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다채롭게 변화했다. 그렇게 비어가는 잔과 함께 계속되던 이야기는 율겐이 스티어와 여행을 떠나기 전, 신 왕조에게 공작 작위를 제안받고 거절한 대목에 이르렀다.

 "그건 당신답네."

 히엔이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율겐은 조금 쑥쓰러워졌다. 이런 평가를 듣는 것이 낯설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하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시절이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왕국에서 버림받고, 쫓기고, 미궁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율겐은 쭉 부와 권력을 원했다. 그걸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었다.

 가족마저도.

 미궁에 막 들어갔을 때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미궁을 헤매며 변했다. 미궁에서 본 환상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등, 율겐이 마음을 고쳐먹게 된 요인은 이것저것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계기는... 그 녀석이겠지.

 "스티어 덕인가."

 율겐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스팅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기고 접근했던 그가 아니었다면 율겐은 결코 지금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허탈함과 분노에 휩싸인 채로, 이룰 수 없는 복수를 꿈꾸며 계속 쫓기고 있었겠지. 그 와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고.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느긋하게 여행을 다니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등, 사소한 행복을 누리며 즐거워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을 터다. 지금쯤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뒹굴거리고 있을 연인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짓던 율겐은 문득 묘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회색 눈동자 한 쌍이 굉장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아니, 아무것도."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프다는 얼굴을 한 히엔은 손에 쥔 술병이 제법 가벼워진 것을 깨닫고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나? 꽤 취한 것 같은데."

 "안 취했어, 안 취했어. 이젠 내가 당신보다 주량 셀 거... 얼."

 "풀린 눈으로 그런 소리 해 봤자..."

 "하! 완전 멀쩡하거든?"

 빈 병을 테이블 위에 쿵 소리 나게 내려둔 히엔은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마음에 차는 것이 보이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율겐은 어쩐지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 취하기는 무슨. 벌써 맛이 갔구만.

 "...성검이라도 찾나?"

 "뭐어야, 당신이 숨겼어?"

 "아니."

 퍽이나. 당신 짓이잖아. 히엔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쏘아붙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나, 없어도 되거든?"

 "뭐?"

 "내가 없다는 데 보태준 거 있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율겐 이 배신자! 그냥 죽어!"

 히엔이 율겐에게 정의의 주먹을 내질렀다!

 허나 피했다!

 흐느적거리는 주먹이 제법 빠른 속도로 뻗어왔지만 율겐은 잽싸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빗나간 주먹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청거린 히엔이 이를 북 갈며 혀 꼬인 외침을 쏟아냈다. 솔로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야한 책도 보여줬더니! 나보고 더럽다고 했다 이거지! 어허허허헝, 자기는 연애한다고! 아쉬울 거 없다 그거냐? 그거야? 성검따위 없어도 나느은! 무적이야! 내 심판을 받아라 율겐! 옛날의 나라고 생각하지 ㅁ... 억.

 취한 놈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 없지. 더 이상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테이블 구석에서 뒹굴던 술병으로 친우의 뒤통수를 사뿐히 쓰다듬어 준 율겐은 기절한 히엔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주량이 늘기는 무슨. 집안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한 탓인지 예전하고 별 다를 바도 없다. 전보다 몸이 크고 팔도 길어져 제법 취한 율겐이 하마터면 맞을 뻔했지만. 그래도 좀 취했다고 유치하게 날뛰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애가 맞다. 율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하인을 호출했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단 저 놈부터 치우라고 시켜야겠다.


 "취했어?"

 "취했지."

 "취했네."

 "그렇지."

 스팅은 고목나무에 매미 붙듯,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 품에 찰싹 달라붙은 율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적당히 마시라고 했을텐데."

 한심한 모습에 대고 불퉁하게 한 마디 던졌으나 들은 척도 안 한다. 주정만 안 할 뿐이지 제대로 취했다.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매달린 점은 좀 마음에 들지만... 딱히 정화해줄 마음이 들지 않아 율겐을 매단 채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며칠 느긋하게 쉬어갈 생각이니 숙취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율겐을 침대에 내려놓으려니 율겐은 팔을 풀 생각이 없는지 끌어안은 목을 잡아당겼다.

 "너도 누워."

 "이건 또 무슨 유혹이야?"

 "닥치고 누워."

 "...누워줄 테니까 머리카락은 잡아당기지 말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순순히 함께 침대에 누우니 율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팅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가 짧아."

 "그야 이 모습이니까."

 "...긴 게 좋아."

 "그래?"

 하긴, 예전에도 검은 머리 쪽이 잘 어울린다고 했지. 여러 번 들은 이야기지만 제 본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말에 새삼 흐뭇해진 스팅은 율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잡는 맛이 있으니까."

 "......"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가 목덜미를 깨물렸다. 자기도 해 놓고는, 하는 투덜거림이 목 위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현명하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율겐은 그 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잠이 든 건가 싶어질 무렵, 한 마디 툭 뱉었다.

 "히엔이,"

 "...응."

 "작위를 거절한 게 나 답다더군."

 "그랬어?"

 "내가 그런 놈은 아니었는데..."

 그래, 그랬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스팅은 처음 만났을 무렵의 율겐과 미궁에서 변화한, 지금의 율겐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달 외에 큰 관심이 없던 남자는 누군가의 죽음에 울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과오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 히엔이 율겐의 그런 행보를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는.

 "그러게. 예전엔 농담 한마디 잘못 하면 사람 잡을 기세였는데."

 "뭐야?"

 "지금도 조금은 그렇지만."

 "......"

 "괜찮아. 그래도 예쁘니까."

 피식피식 웃으며 놀리듯 말하자 순간 발끈하던 율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라 율겐을 떼어내고 얼굴을 확인하자 조금 붉어진 채 고심하는 얼굴이 보였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스팅이 말없이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만 있던 와중, 머뭇거리던 율겐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스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덕이다."

 "응?"

 "내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거."

 진지하게 말을 잇더니, 이내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는다. 웃으라고 판을 깔아줬으니 이대로 폭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스팅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짙게 미소지었다.

 "율겐."

 "...안 들려."

 "율겐, 나 좀 봐봐."

 "안 봐."

 "잘만 들리네."

 "안 들려."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율겐은 스팅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음, 가끔은 취한 모습도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율겐은 귀를 막은 손을 떼어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하고 싶은데."

 "응?"

 뭔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스팅은 눈을 깜빡였다.

 "하자고."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녹회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잎의 뒷면같은 눈이다. 작정하고 들춰보지 않는다면 그 진면목을, 편린조차 보기 어려운 귀중한 빛깔. 누구나 알아챌 수 없기에 더욱 마음에 드는 것. 가장 소중한 내 사랑. 나의 율겐.

 "테루시아네서는 하지 말자더니?"

 "그랬던가..."

 웅얼거리다 말꼬리를 흐리며 제 입에 가볍게 입술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거긴 여관이었고. 여기서는 해도..."

 "사용인이 갈 테니까?"

 "뭐, 대충."

 스팅은.

 아니, 스티어는.

 붉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나며 매혹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사양할 생각 따위 눈꼽만큼도 없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이 겹쳐지고, 체온이 뒤섞인다.

 익숙하고도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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