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거점을 둘러보던 중, 창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메릴이 또 기어들어가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인가 싶어 지나치려는데 문틈으로 손 하나가 비죽 나와 손짓한다. 아, 메릴이 아니었군. 수련장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에렌델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창고로 들어갔다.

"왔네요, 에렌델."

 라이넬이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또 창고에서 무언가를 찾아낸 모양이다. 이제 필요한 물건은 거의 다 찾아내서 뒤질 필요가 없을텐데. 이렇게 잊을 만하면 무언가를 발굴해 내는 것도 능력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이 미궁에 끌려 들어온 사람이 많고, 그 역사가 길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에렌델은 무거운 생각은 한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숙소 밖에서는 남의 눈 없이 둘만 있을 기회도 의외로 적다.

 "이번엔 뭘 찾은 건데?"

 "이거요. 오래된 것 같은데도 잘 움직이더라고요."

 라이넬은 작고 낡은 오르골을 보여주더니 태엽을 감았다. 천천히 부품이 돌아가며 단음조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단순하지만 포근한 곡조. 에디누스와 주변 지역들에서 주로 불리는 자장가였다.

 "...어릴 적 생각 나는데."

 "저도 어릴때 어머니가 종종 불러주셨죠."

 "내 경우는 유모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고 그리운 곡조에 빠져들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던 어머니. 육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어머니 대신 어린 에렌델을 돌봐 준 것은 유모였다. 그나마도 에렌델이 조금 자라자마자 재정 부족을 이유로 내보냈지만. 그녀가 떠나던 날의 기억은 굉장히 울적했다. 아마도 조금, 울었던 것도 같고.

 "에렌델."

 "응?"

 무심코 돌아보니 무언가가 볼을 쿡 찔렀다. 잘 보니 손가락이었다. 라이넬의.

 "...라이넬."

 "네?"

 "그 나이 먹고 이러고 싶어?"

 "당신한테라면요."

 다정하게 웃는 얼굴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이런 뻔뻔함, 이젠 하루이틀 겪은 것도 아니다. 배신하기 전이나, 배신한 후나, 에렌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든든한 아군이 되어준 이후나. 이 점만은 변하질 않았다. 성실한 인상과 다르게 은근히 요령을 피우고, 다정한 태도에 방심하는 순간 사람을 놀리곤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에렌델은 라이넬에게 서먹한 눈길을 보내곤 입을 다물었다. 이젠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불끈 쥐어지는 주먹은 어찌 하기 힘들었지만.

 "또 화나셨어요?"

 "...아니, 야...?!"

 채 말을 끝내기 전에 라이넬이 양 손을 잡아챘다. 이러면 손을 못 잡잖아요, 에렌델. 부드러움 속삭임과 대비되는 단호함으로 주먹을 강제로 편 라이넬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이 상황. 어차피 아직은 라이넬의 힘에 당해내지도 못하고 기운만 빠진다. 너 좋을대로 해라 자식아. 에렌델은 저항하던 힘을 뺐다. 순순히 몸을 맡기자 라이넬은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잡았던 손을 놓고 한 발 물러섰다.

 "왜?"

 얌전히 물러서자 오히려 의아해진 쪽은 에렌델이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마치 레이디에게 춤을 신청하듯, 정중하게 손이 내밀어지고, 녹아내릴 듯 달콤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는 순수한 애정과 배려가 가득한 몸짓.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라이넬을 바라보자 상냥하지만 진지한 미소가 떠오른다.

 에렌델. 타인의 목소리로 나직이 불리는 이름이 이렇게까지 듣기 좋을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에렌델은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만족스러운 기색을 띤 라이넬은 그 손을 이끌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춤을 리드했다. 제국 황실에서 열리는 파티 한가운데 세워놓더라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한 솜씨였다.

 문제는,

 "왜 내가 여자 역인데?"

 "에렌델, 저보다 작잖아요."

 이 새끼는 꼭 이런데서 단호하더라. 에렌델이 날카롭게 쏘아보거나 말거나, 라이넬은 여유만만하게 스텝을 밟아나갔다. 그 뻔뻔함에 먼저 기가 빠진 쪽은 에렌델이었다. 포지션은 마음에 안 들지만 훌륭한 리드였다. 화려한 연회장과 감미로운 악단의 연주는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잊혀진 미궁 안, 낡고 초라한 창고에 서 있었고 아득한 추억을 노래하던 오르골의 자장가도 그친 지 오래였지만.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사소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라이넬이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만족했다. 그 사실에 안도했다.

 어깨에 툭, 이마를 기대자 지체 없이 감싸 오는 팔은 따뜻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라이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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