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폐하께서 일정을 취소하고 방에 홀로 틀어박히는 날에는 리이난트 백작이 찾아온다. 때는 이른 아침이기도, 오후 느즈막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는 일은 없다. 휴식을 취할 때면 시종장의 출입조차 허가하지 않는 황제지만 그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그다지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보기 어려운 방문임에도, 백작과 황제의 일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귀에까진 들어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구석이 가득한 방문이요, 만남이지만 황제의 내궁을 지키는 기사들은 백작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의 극한에 다다른 신이 인간으로 추락했을 때 그 곁을 지킨 자. 황제 다음 가는 수준의 검성. 본인이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만큼 보는 눈이 까다로운 황제가 극찬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검사. 궁에 들릴 때마다 황제의 안전을 신경써 순찰과 보안에 조언을 주곤 하는 백작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그가 찾아오는 시기라든가, 평소 사석에서 황제 폐하와 만날 때의 분위기가 조금, 아주 조금 묘하기는 하지만. 황제의 오른팔인 라르비아 경이 리이난트 백작만 보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백작에 대한 신뢰는 그 정도 사소한 문제는 기분 탓으로 넘기게 만들고 그들의 입을 철통같이 다물게 만들었다. 세간에 소문이 무성함에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문이 퍼져도 딱히 상관 없는데 말야."


라이넬 리이난트 백작은 황제의 침실에 들어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주방에 들러 두 사람 분의 음식을 넉넉히 챙기고, 호위기사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들어온 방은 황제의 침실 치고는 검소했다. 익숙한 태도로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은 그는 주저없이 침대로 향했다. 그가 들어오는 기척은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침대 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몸을 작게 말은 도롱이 하나는 허물을 벗을 기미가 없다. 라이넬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허다하게 도는 소문에 하나 더 추가된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고."

"...그렇다고 늘릴 궁리는 하지 마. 피곤하니까."

"안 해. 내가 뭐하러."


이런 궁상맞은 황제 폐하의 모습을 아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한데. 라이넬은 희미하게 웃으며 황제가 뒤집어 쓴 이불 끄트머리를 걷었다. 살짝 눌리고 흐트러진 금발 아래로 부루퉁한 얼굴이 드러난다. 황제로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조금 메마른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잠은?"

"잤어."

"식사는?"

"......"

"몇 시간 째야?"

"...서른 시간, 정도."

"......"


사랑스러운 것과 별개로, 쉬는 날마다 보이는 생활태도가 갈수록 어느 마족을 닮아가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지만. 아니, 그 자는 최소한 간식이라도 제때 꼬박꼬박 챙겨먹는다고 들었는데.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왜 이러고 사는지. 라이넬은 에렌델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어박히고 싶으면 요기할 거리라도 챙겨두라고 그랬지. 그게 싫으면 사람을 부르거나."

"그랬지."

"왜 안 그러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라이넬은 언제나처럼 도돌이표를 찍는 대화에 미간을 찌푸렸다. 답이 정해져 있으니 물어보든 추궁하든 의미가 없다.


"그럴거면 나도 들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너니까, 괜찮아."


이건 좀 마음에 든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에렌델 아이제나흐는 요령 없는 사람이다. 마치 수 년처럼 느껴지던 몇 달 간, 미쳐버린 미궁에서 서로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며 자연히 알게 되었다.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정작 제게 쏟아지는 애정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적에게는 냉정하고 무자비하지만, 한 번 정을 준 이들에게 우스울 정도로 약해진다. 겉보기에는 굳건해 보이지만 실상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사람. 누군가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쉽사리 흔들려 내면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 몸 안에 인간을 초월한 힘을 품고 있음에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

언젠가 제 입으로도 말했듯이 고작 제 가정사에 상처입어 울던 어린애일 뿐. 그 점은 황제가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아지긴 했다. 나아진 만큼 남들 안 보는 데서 한술 더 뜨게 되었다는 게 문제지만. 밖에서는 완벽한 황제의 모습을 고수하며 뒤로는 있는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피로가 한계에 달하면 제 방에 틀어박힌다.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은 채 홀로, 자신이 짊어진 책임의 중압감을 삭이려 든다. 제 주변의 흐름을 늦추고 세상의 시선에서, 법칙에서 자유로워진 짧은 순간에만.

남들에게 적당히 부담을 떠넘기든 혼자 속 끓이는 일 없도록 말을 하든. 무얼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에렌델은 제 짐을 누군가와 나누는 데 서툴렀다. 그 좋은 머리로는 알고 있을텐데 도무지 실천을 못 한다. 여전히 서투르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것 봐. 이렇게 되잖아. 잠기운이 덜 가신 얼굴로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거두며 깨끗한 손등으로 매끄러운 피부를 턱부터 쓸어올린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따끈하게 차오른 볼을 살짝 꼬집자 발끈한 시선이 즉각 따라붙는다. 라이넬은 피식 웃었다.


"한심하기는."


한심한 사람.

그렇기에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랑.

라이넬 리이난트의 연인.



---



"혼자 할 수 있다니까."

"기각."


충분히 배를 불렸으니 더는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꼴을 참아 줄 이유가 없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항의는 한 귀로 사뿐히 흘린 후 존귀함의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는 폐하를 발가벗겨 욕실로 밀어넣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에렌델을 담궈두고 제 옷도 벗고 오니 시선을 내리깔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제 딴에는 시위라지만 라이넬이 보기에는 코웃음만 날 뿐이다.


"불만이면 내가 오기 전에 시중 들어줄 사람을 들이라고."


물을 받아 머리 위에서 조심스럽게 끼얹으며 빈정거리자 새파란 시선이 찌릿하게 꽃힌다.


"...네가 할 말이야?"


제딴에는 꽤나 벼르고 있던 사안인지 불퉁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라이넬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끌고 들어와 씻길 때는 목욕을 마칠 때까지 부루퉁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뭘."

"시중받는 거 마음에 안 든다고 살기 뿌린 건 너잖아."


조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내가 그랬나? 억울해 죽겠다는 에렌델의 표정을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남에게 시중받는 꼴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던 건 사실이다. 그게 에렌델의 신분에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으며, 라이넬 자신도 평민처럼 지낸 시절이 있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남의 시중을 받는 것이 퍽 익숙한 위치였음에도.

라이넬은 묵묵히 에렌델을 응시하다가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는 새파란 눈 위에 손을 턱 덮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에렌델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정수리에 물 한 바가지를 확 끼얹었다.


"너어!"


기함하는 목소리가 다음 마디를 내뱉기 전에 한 번 더 물을 끼얹자 욕실은 고요해졌다. 라이넬은 만족스럽게 웃고 에렌델을 씻기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에렌델의 몸에 남이 손을 대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연인의 직업이 황제라는 것이 뭐 대수인가. 그것이 라이넬의 독점욕에 불을 지르면 질렀지 자제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인의 위에 선 황제 폐하께서 제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 울고 웃고 화내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솔직히, 오싹하리만치 좋았다. 가끔은 더 처절하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 정도로.

젖은 머리칼을 한데 잡아 옆으로 젖히니 드러나는 흰 목덜미에 비누거품을 묻히는 대신 입을 맞추며 이를 세우고 싶었다. 에렌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기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으니까. 에렌델이 검성인 탓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자국이 사라져버리곤 하지만 그만큼 자주, 세게 흔적을 남겨줄 수 있으니 그도 나쁘진 않다. 피부를 핥고 자근자근 씹으며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것도 좋겠지. 한창 부드러운 살결을 탐하다 몸을 뒤집으면 새빨개진 얼굴을 한 에렌델이 푸른 눈망울에 물기를 글썽이며 쾌감과 원망이 한데 섞인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볼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허리 아래가 뻐근해져서 조금 곤란했다. 물론 뒤를 풀어주지 않고 이대로 급하게 안아 안이 찢어지더라도 에렌델이 아파하는 것은 잠깐이다. 몇 번 자극해주면 금방 좋아하면서 숨이 넘어가겠지...만 굳이 피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니까. 정말로. 괜히 불편해 보여서 남의 시선을 끄는 것도 싫고.

들끓는 욕망과 독점욕을 애써 다스리며 에렌델을 씻기는 데 전념하고는 있었지만 라이넬이 계속해서 이런저런 생각-조금 음란하거나 흉폭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에렌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때때로 에렌델을 씻기는 손길이 은근하게 애무하듯 피부를 누르고 있으니 아무리 둔한 에렌델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떨리는 눈꺼풀을 보면 아는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눈을 꼭 감은 채 필사적으로 모른척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이제 좀 덜 귀여워 보일 때도 되지 않았나. 어쩌자고 내일모레 서른인 남자가 이렇게 귀여운지. 라이넬은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에렌델의 몸에서 비눗기를 전부 씻겨내고 욕조 밖으로 이끌어 커다란 타올로 물기를 훔친 후, 뽀송한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리고 끝났다는 신호로 평소보다 배로 뽀얗게 보이는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다 됐어."

"...응."


여전히 꼭 감겨있던 눈꺼풀이 들리고 조심스럽게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가 무척 익숙하고 사랑스럽다. 라이넬은 작게 오물거리며 대답하는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목을 감아오는 팔에 지극히 만족하며 라이넬은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



"...항상 생각하는 건데."


에렌델의 어투는 조금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에렌델의 등뒤에서 옅은 금빛 머리카락에 밴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내던 라이넬의 손길도 함께 느릿해졌다.


"능숙해."

"많이 해봤거든. 동생들이나, 가끔 누나나."

"......"


내리앉은 침묵이 묵직했다. 넉넉한 가운 안으로 보이는 에렌델의 목덜미가 조금 움칠거렸으나 그 반응에 당황은 섞여있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답을 들은 자의 침묵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건 아니니 됐다. 라이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움직여 남은 물기를 꼭꼭 짜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무디게 만든다. 에렌델과 연인이 되고 몇 년이 지났을 즈음부터 라이넬은 둘이 함께 있을 때 가족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일에 별 거리낌이 없어졌다. 라이넬 리이난트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에서 가족은 무척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런 자신과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 앞에서 가족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하다. 비록 에렌델이 그들의 죽음에 제법 큰 역할을 했다곤 하더라도. 라이넬이 그들에 대해 침묵하는 날은 오지 않을 터다.

사실, 가끔은 에렌델이 아직도 죄책감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미궁에서 탈출한 후 에렌델은 자신의 잘못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괴로워하면서도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참 묻어두었다가 간신히라도, 라이넬의 앞에서 굳이 가족의 이야기가 나올 법한 화제를 꺼내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라이넬은 에렌델의 그런 모습이 조금 답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라이넬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계속해서 기억해주고 있다는 증거니까.

만약 에렌델이 죄책감에 짓눌려 라이넬에 대한 애정을 일종의 보상이나 의무로 여겼다면,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지금같은 관계는 될 수 없었다는 건 확실하지. 그러니 이 정도가 딱 좋다. 언젠가 먼 훗날에는 라이넬도 희미한 원망과 심술을 버리고, 에렌델도 죄책감에 움츠러들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얘기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라이넬은 내리깔린 침묵을 방치한 채 제 할일을 마쳤다. 마도구로 보송하게 말린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올려 입술에 대었다. 옅은 온기가 만족스럽다. 그 빛깔만큼이나 희미하지만 마음에 진하게 스며드는 온기를 즐기다 나직이,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에렌델."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투명하고 푸른 빛에 서린 약간의 불안과 죄책감을 읽어낸 라이넬이 다정한 시선을 한참 맞대면, 어느 순간 작은 파문은 잦아들고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슬그머니 도망치는 푸른 시선만이 남는다. 하지만 라이넬이 발개진 뺨을 감싸며 채근하듯 재차 부르면 에렌델은 눈꼬리를 파르라니 떨면서도 다시 라이넬을 바라본다.

그것은 실로 다정한 구속이었다.

그대로 녹아들고 싶을 정도로 달큰한 애정 아래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에렌델을 원하는 마음이, 집착이 있었다. 그 사실을 새삼 느낄 때마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라이넬.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여 그런 모양을 만드는 것은 차마 끝까지 대담해지지 못하는 주제에 숨기지도 못하는 어설픈 솔직함 때문이리라. 그렇게 모자란 말을 채우듯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라이넬의 가운 끝자락을 잡으면, 눈치가 비상한 연인은 에렌델이 무엇을 원하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은 조금 얄미우면서도 역사책 속의 성화처럼 찬연하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저 아까워하며 그 얼굴을 홀린듯 바라보면 라이넬의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가까워진다. 에렌델이 아찔한 현기증을 견디다 못해 눈을 감아버리면 이마 위에, 닫힌 눈꺼풀에, 콧잔등에, 뺨에 입술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깃털같은 입맞춤을 남긴 그는 너무 깔끔하게 물러났다.


"...라,"


아쉬움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리려던 에렌델이 눈을 홉떴다.


"읍, 흐... 읏, 으,  흐응."


낚시였냐, 이 자식아!

호통치며 한 대 치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라이넬에게 틀어막힌 입 속에선 상대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달콤한 신음만 흘러나온다. 구강의 여린 점막을 자극하고, 혀를 얽어 올려 희롱하는 키스는 무척 농밀해 에렌델은 속절없이 쾌감에 쓸려갔다. 라이넬과 만나고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이제는 성적인 접촉에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라이넬이 작정하고 리드할 때는 늘 호흡이 달리지 않게 애쓰는 것이 최선이라니. 한창 기분 좋은 와중에도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어 물기로 흐려진 시야를 애써 깜빡여 라이넬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마주친 녹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근사한 눈웃음을 지어버리니 끝까지 화를 내기도 어렵다. 결국 포기하고 눈을 감아 몸을 내맡기면 라이넬은 다정하게 뒷목을 쓸어내리며 더욱 깊게 접촉해온다.

에렌델은 그것이 못내 좋았다. 이대로 하나가 되어 녹아내리고 싶을 정도로.

등에 짊어진 거대한 제국도. 과오와 후회로 가득한 피투성이 과거도.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단지 에렌델 아이제나흐로서. 오로지 라이넬 리이난트만을, 라이넬이 쏟아주는 애정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에렌델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제국의 영웅이자 지고의 좌에 앉은 황제.

온갖 힘과 축복, 영광이 함께한다 한들 에렌델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지탱해주려 애쓴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음에도 너덜너덜하게 지쳐버리는 날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을 늦추고, 홀로 틀어박혀 죽음처럼 긴 휴식을 취하더라도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보살펴 준 것은 소중한 연인의 온기였다. 사랑이었다. 라이넬이 다정하게, 때로는 강압적으로 그를 일으켜 주면 에렌델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에렌델은 라이넬의 목을 끌어안았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연인들에게 휴일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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