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카와 엘세벤느가 도레아와 에루루를 데리고 탈출한 뒤, 사람이 줄어든 거점은 심하게 썰렁해졌다. 이렇게 탐색을 나가지 않는 날에는 그 썰렁함이 한층 더 크게 느껴진다. 세라피나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정말 그렇네.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데 아크는 자리를 비웠으며 이사나는 율에게 관리자 수업을 받으러 갔고, 이든은 에반이 가벼운 감기에 걸려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거점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세라피나와 라이넬 단 둘 뿐이다. 거점이 휑해지니 두 사람은 자연히 주방에 모여 티타임을 가지며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라이넬이 6구역에서 사 왔다며 내놓은 차는 세라피나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평소에도 그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은근히 세련됐다고 생각했지만 차 취향도 제법 훌륭하다. 세라피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놀랐지 뭐예요."

"...그 말씀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만."

"정말 놀랐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이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기도 좀 그렇고. 이 정도는 좀 들어줘요."


세라피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라이넬의 난처한 얼굴을 실컷 감상했다. 라이넬과 에렌델, 두 사람의 관계는 대부분의 동료들이 눈치챈 것 같지만 당사자들이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 은연중에 쉬쉬해주는 분위기가 짙었다. 솔직히 에렌델 때문에 티 엄청 나는데 그냥 공개연애하는 게 낫지 않나? 세라피나는 현명하게 그 말을 목 뒤로 넘기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누가 먼저 고백한 거예요? 역시 당신?"

"...아이제나흐 경요."

"...네?"


세라피나는 아주 놀랐다. 당연히 라이넬일 줄 알았는데.


"맙소사. 대체 어떻게 꼬셔냈길래 그 에렌델이 먼저 고백을 해요? 라이넬 대단하네요?"

"...그러니까, 그, 꼬신... 다는 표현은 좀."

"에이, 또 그런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라이넬도 은근히 조신하다니까. 그런 점은 에렌델하고 딱이네요."


라이넬은 골치아프다는 기색을 꾹 누르며 힘겹게 답했다.


"...아이제나흐 경이 정숙하시긴, 하지요."

"라이넬도예요. 애인한테 딱딱하게 아이제나흐 경이 뭐예요? 아이제나흐 경이."


별 소용 없었지만.


"둘만 있을 때도 그러는 건 아니죠? 에렌델이 뭐라고 안 하나? 저라면 섭섭할 것 같은데."

"에렌델은..."


세라피나의 공세에 계속 몰리던 라이넬은 얼결에 에렌델을 이름으로 지칭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그렇지, 둘이 사귀기도 전부터 좀 풀어졌거나 평정을 잃었을 땐 이름을 부르는 걸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평소에는 남들 의식해선 아닌 척 한다니까. 세라피나는 조금도 자제하지 않고 깔깔 웃으며 라이넬을 놀렸다. 라이넬은 그런 세라피나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지 차나 더 끓이겠다면서 빈 포트를 들고 잽싸게 일어섰다. 네 살 연상인데다 자신보다 키도 한참이나 큰 남자가 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세라피나는 조금 더 웃었다.

부러웠다. 좋은 사람을 만난 라이넬이. 그리고 좋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에렌델이. 두 사람이 잘 된 것은 정말 기쁘고 축하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외로웠다. 제 연인이 그리워졌다. 이 순간에도 아이제나흐와 대치중일 클라인은 무사할지. 바깥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잠시 거점을 돌아보려 주방을 나서던 세라피나는 깜짝 놀라 그대로 발길을 멈췄다.


"라이넬. 라이넬! 잠깐 와 봐요."

"왜 그러십니까?"

"하늘, 이."


천장밖에 없는 거점에 웬 하늘? 의아해하며 세라피나에게 다가간 라이넬의 눈에도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해진 거점만큼이나 낮은 침음성이 깔렸다.

---

별빛 가득한 밤이 꿈결처럼 펼쳐져 있었다.

거점의 마법진으로 돌아온 네 사람은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양 마법진을 내려다본 후,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도는 다르지만 황망한 표정들을 보니 아무래도 귀환석이 잘못되어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거나 헛것을 본 건 아닌 모양이다.


"오셨습니까."

"이사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마 프레아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황망하던 얼굴들이 당혹감 반 어이없음 반으로 요상하게 변해갔다. 이사나의 뒤에 서서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라이넬이 그들에게 전적으로 동감이라는 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상하긴 하죠. 율이 오늘 하루 정도만 지속되고 별 이상은 없을 거라 보장했답니다만."

"그럼 다행이지만... 좀 놀랐어도 예쁘긴, ...하네."


무심코 중얼거리다 라이넬의 말에 답했다는 것을 깨달은 메릴이 숨을 삼켰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메릴은 흠칫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던 라이넬은 약간의 침묵 후,


"...그렇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금은 나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둘 다. 에렌델은 흐뭇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려 세라피나에게 입만 벙긋여 물었다. 아크는?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들어 호수쪽을 가리켰다. 세라피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왔다. 잠시 라이넬의 시선이 따라붙은 것 같지만 꿋꿋하게 돌아보지 않고 발을 바삐 놀렸다.

---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호숫가에 드러누워 별을 올려다보던 아크는 에렌델이 다가오자 그렇게 말했다. 딱딱하게 일자로 다물린 입매를 보니 심경이 복잡한 듯했으나 에렌델은 모르는 척 물었다.


"프레아가 멀쩡할 때였다면?"

"...깜짝 선물같은 게 아닐까 싶었겠지."

"그럼 그렇게 생각해버려."


아크는 제 옆에 털썩 주저앉는 에렌델에게 말없이 시선을 보내다가 피식 웃었다.


"말 한번 쉽게도 하는군."

"어쨌든 예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됐지."

"그런가."

"응."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 없다면 하루 정도는 편하게 생각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미쳤다 해도 하루쯤은 프레아가 제정신일 수도 있다. 아크에게 선물을 준 것일지도 모르고, 변덕을 부려 인심을 썼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쪽의 관심을 다른 데 끌어두고 어떤 일을 획책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정답은 프레아만 알고 있을 마당에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두고 의심만 하다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아깝다. 그 부분에 공감한 아크는 조금 그리운 눈으로 홀린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조금은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에렌델은 그런 아크를 곁눈질하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라이넬과 메릴이 어쩌고 있을지도 궁금하고 아까 라이넬을 두고 그대로 빠져나온 것도 조금, 걸리고. 뒷감당이.


"아마 별일 없을거다. 그쪽은 지금 단체로 분주한 모양이니."

"어?"

"가 보면 알아."


아크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게 웃었다. 속내를 정통으로 들킨 에렌델의 귓가가 확 달아올랐다. 은근히 허술한 면이나 공주님이라는 별명 때문에 가끔 까먹지만 이러는 걸 볼 때마다 천년 묵은 할아버지라는 게 실감난다. 아니, 공주님이니까 천년 묵은 마녀인가? 에렌델은 괜히 뜨끈한 귓볼만 연신 매만지며 잰 걸음으로 물러났다.

---

"이제 오냐?"

"이건 뭐야."

"뭐긴, 즐거운 술판이지."


다시 돌아온 광장은 간만에 왁자지껄했다. 날라 온 안주를 차리고 자리를 정돈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술병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손을 흔드는 테메릭을 본 에렌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이런 기회는 절대 안 놓치지. 딱히 말릴 생각은 들지 않지만. 2거점 사람들이 탈출한 후로는 유독 조용했던 거점이다. 가끔은 모두 함께 즐길 일도 필요하겠지. 에렌델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잔을 돌리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로 합류했다.

만들어진 풍경이라지만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수도 없이 반짝이는 별들은 무척 아름다웠다. 간간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일도 있어 다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보다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어느새 몇 잔을 비우고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한 세라피나가 기분 좋게 웃었다.


"별이 정말 쏟아질 것 같네요."

"그러게. 저게 다 돈이면 좋을텐데."

"꼬맹이라 그런지 풍류를 모르는구만?"

"뭐래? 너라고 알긴 하는 줄 알아?!"

"너보단 잘 알지."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메릴과 투닥거리는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핀잔을 주는 릭스를 불만스레 쳐다본 테메릭은 이내 실실 웃으며 그에게 바싹 붙어앉았다.


"그러는 당신은 예쁜이랑 본 밤하늘이라도 생각하면서 마시는 ㄱ, 왜 때려."

"맞을 짓을 하면 맞아야 하지 않겠어요?"

"고맙군, 이사나."

"천만에요."


저 자식은 이미 끝난 일 갖고 같잖은 소리를. 눈치만 빨라선. 라이넬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앉은 에렌델을 흘깃 쳐다보니 저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다. 이쪽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지만. 에렌델의 뚱한 표정에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마음이 풀어진 라이넬은 에렌델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왜?"

"채워 줘."

"응. 아, 비었다. 잠깐만."


에렌델이 반쯤 일어나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새 병을 집었다. 그 덕에 무척 잘 보이는 각도에 위치한 에렌델의 허리와 하체 라인을 흐뭇하게 감상한 라이넬은 병을 따고 술을 따라주려는 에렌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제 내가 채워 준 만큼, 듬뿍 부탁해."


잔을 채우며 멍하니 라이넬의 말을 곱씹다 그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에렌델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개졌다. 병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에 술이 넘쳐 흘러 라이넬의 손을 적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연실색하며 닦을 걸 가져오겠다며 황망히 일어나 주방으로 허둥지둥 달려간다.


"풉... 푸하하핫!"


그 뒷모습을 보자니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고, 나름대로 참아보려 애썼지만 더는 견딜 수 없어 폭소를 터뜨렸다. 잔 한번 넘쳤다고 갑작스럽게 낄낄대기 시작하더니 종내에는 눈물까지 찔끔 맺히도록 웃어 젖히는 라이넬에게 갑자기 왜 저러냐는 시선이 몰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배가 당겨 더 웃을 수 없을 때까지 웃어댔다.

누구도 자신이 웃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미치도록 유쾌했다.

별이 쏟아지고, 사랑하는 자는 죽도록 유쾌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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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델은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기분 좋게 취하고, 웃고, 떠들고, 당황하고,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대로는 일어날 시간이 될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 거점이라도 한 바퀴 돌고 다시 누울까. 가볍게 겉옷만 걸치고 숙소 밖으로 나가자 하늘은 여전히 쏟아질 듯 많은 별무리의 반짝임으로 가득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너야말로."

"잠들기 아까워서."


나야 하루 정도는 밤을 새도 문제 없고. 광장 한쪽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라이넬은 그렇게 답하며 제 옆자리를 손으로 쓸고는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고작 자리를 권하는 행동 하나에도 몸에 밴 매너와 다정함이, 귀족다운 우아함이, 뛰어난 검사다운 절제가 숨쉬듯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다. 에렌델은 조금 멍하니 그 동작을 지켜보았다.


"에렌델?"

"...어, 응."


라이넬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일텐데 혼자 넋이 나가선. 괜히 쑥쓰러워진 에렌델은 라이넬이 내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시선을 피했다. 연인에게 이런 배려를 받는 것은 솔직히 기쁘다. 하지만 어색했다. 얼마 전에 한 번 그런 심정을 털어놓았을 때, 라이넬은 쿡쿡 웃으며 차츰 익숙해지면 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말대로 익숙해지는 날이 정말로 오기는 할... 에렌델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겠지. 올 것이다. 불길한 생각을 있는 힘껏 몰아내며 라이넬의 어깨에 고개를 슬쩍 기대보았다. 그러자 라이넬은 기대기 편하게 몸을 틀어주며 팔로 에렌델의 등과 허리를 단단히 감싸온다. 안정감이 찾아든다.

그래, 이런 식으로 익숙해지는 것일 터다.

에렌델은 라이넬이 말없이 베풀어주는 상냥함이 좋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깊은 인내로 에렌델을 굳건히 지지하는 믿음이 좋았다. 그 광대함에 허우적거리도록 쏟아부어지는 애정이 좋았다.

정말로, 눈물나게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치솟는 의심에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저려올 만큼.


"라이넬."

"응?"

"...아냐, 아무것도."


싱겁기는. 라이넬이 피식 웃더니 에렌델의 머리통에 제 뺨을 얹어 눌렀다. 가벼운 무게감이 일정한 리듬으로 연신 내리앉자 자꾸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려 드는 사고도 짓눌려, 멎는다. 에렌델은 내심 안도하며, 입으로는 무거우니 치우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면 라이넬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뺨을 마구 비벼 온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진다. 사고도. 의심도.
아예 자세를 바꿔 연인을 온전히 품에 넣은 뒤 머리를 실컷 새집으로 만들어 놓은 라이넬은 에렌델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네."

"...그러게. 혼자 보기도 아깝고. 에반도 보면 좋았을 텐데."


이쯤 되면 너무 속 보이는 말 돌리기라 오히려 귀엽다. 라이넬은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딱히 넘어간 건 아니다. 귀여워서 그냥 봐 주는 거지. 라이넬은 그런 뉘앙스를 굳이 숨기지 않고 웃음기 역력한 목소리로 답했다. 불퉁한 얼굴로 이쪽을 흘겨보는 에렌델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모습까지 마냥 귀여워 보이니 나도 참 큰일이지. 토라진 연인을 달래려 손을 뻗어 부드럽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며 머리를 빗겨 주니 에렌델이 나른한 한숨을 내쉰다. 조금 더 그 시간을 만끽하다 에렌델을 놓아 준 라이넬은 주머니를 뒤져 영상석을 하나 꺼냈다.


"나중에 보여줄 겸해서 찍어둘까? 다시 못 볼 광경이기도 하고."

"그래도 괜찮아?"

"아직 몇 개 남았으니까."

"...뭐 하러 그렇게 많이 샀어?"


6구역에서 사는 게 바깥보다 좀 더 싸긴 하지만 못 구할 물건인 것도 아니고. 미궁 내에서 영상석이 필요할 일은 딱히 없을 텐데? 에렌델이 의아해하자 영상석이 밤하늘을 찍도록 조정한 라이넬은 시선만 돌려 눈웃음을 쳤다.


"원래 너랑 있을 때 쓰려고 산 건데 말이지. 이렇게도 쓰게 되네."

"?"


전혀 못 알아먹겠다.


"너하고 좋은 거 할 때 쓰려고 샀다고."


뭔가 알 것도 같은데... 감이 잡힐랑 말랑한 것이...

친절하게 풀어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영 감이 안 잡히는지 끙끙대고 있는 연인을 위해 라이넬은 에렌델의 귓가에 바싹 다가붙어, 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랑, 섹스할 때, 찍으려고."


드디어 이해한 에렌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 왜 얘기가 그, 그그, 그그렇게 되는 건데?!"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


아, 터졌다.

과도한 경악과 수치심에 부하가 걸렸는지, 에렌델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넋을 놓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멍청하다고 비웃어주었을 그 표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라이넬은 뻣뻣하게 굳은 에렌델의 뺨에,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돌려 에렌델을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에렌델이 진정할 때까지 이대로 내버려 둘 요량으로 라이넬은 느긋하게 머리 위로 시선을 던졌다.

지하를 수놓은 별무리는 한참을 지켜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라이넬은 그 풍경을 눈에 새기며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에도 그가 처한 상황은 여전히 크게 나아지지 않았으며, 가족에 대한 죄책감도 여전하지만,

그 사실이 이전처럼 참담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별은 빛나고, 바로 곁의 연인은 사랑스러우며, 라이넬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다.

더는 바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행복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돌아왔다. 혼자 넋을 놓고, 부끄러워하다, 진정하고, 어느새 안온한 온기에 기대어 잠든 소중한 이와 함께. 새삼스러운 눈으로 곤히 잠든 에렌델을 돌아본 라이넬은 그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떨어뜨렸다. 안으로 옮겨 편히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입을 맞춘 채 오래도록 멈춰있다가, 이제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입에 익은 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에렌델."


몇 번이고.

셀 수 없이,

찬연한 별빛 아래에서. 그가 편안한 꿈에 잠기기를 바라며.

---

"안 잡아먹으니까 표정 풀지 그래?"

"......"

"오늘은 아무 것도 안 해. 이리 와서 앉아."


안 앉으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아니, 잘라서라도 앉힐 사람이지. 누가 부녀 아니랄까봐 눈 뽑아서 사람 앉히던 누구와 전혀 다른 방향이지만 꼭 닮았다. 그러니까 당하는 사람 생각 안 한다는 점이.
세라피나는 주춤거리며 프레아의 곁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편하게 앉아."


에라 모르겠다. 사양 앉고 다리를 쭉 뻗었다.


"...무슨 속셈이죠?"

"별이나 보자고."

"......"


며칠 전까지 몸을 빼았느니 뭐니 하던 사람이 이토록 평화로운 제안을 할 리가 없는데. 이거야말로 꿈이 아닐까? 슬쩍 볼을 꼬집어 보니 아프다. 꿈은 아니고 평소에 꾸던 악몽이네. 혼자 납득하고 있다가 프레아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단 것을 깨닫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왜 하필 저랑이죠?"

"너나 나나 같이 봐줄 사람 없잖아?"


최소한 여기에는. 프레아가 피식 웃으며 덧붙인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세라피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프레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라피나의 표정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처음에는 온갖 잡념으로 가득하던 얼굴이 차츰 가라앉고, 약간의 우수가 깃든다. 깜찍하게도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연인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순수한 걱정으로 가득한 눈빛이 조금 부러웠다.

나는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프레아는 재차 치밀어 오르려는 광기와 분노를 꾹 누르고 세라피나에게서 눈을 뗐다. 언젠가 아크와 함께 보았던 밤하늘에서 그리움을 느끼는 이는 오직 프레아뿐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율과 아크는 자신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일을 벌였을지 궁금해하고 있겠지.

하지만 정말, 드물게도, 아무 속셈도 없었다. 오랜만에 정신이 맑아진 신이 베푸는 하룻밤의 자비요, 호의일 뿐이다.

비록 내일이 되면 다시 제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겠지만.

사랑하는 아크도, 존경하는 아버지도, 그 누구도 봐주지 않겠지만.

오늘 밤만은 좋은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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